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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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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바드 1세는 488년 사산 왕조의 샤로 즉위하여 496년 폐위되었다가 498/499년에 복위하여 531년 사망한 인물이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공산주의적 시각의 마즈다크교를 후원하며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폐위되기도 했다. 이후 에프탈의 지원을 받아 복위한 후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하고 개혁 정치를 펼쳤다. 그의 개혁은 아들 호스로 1세 때에도 이어졌으며, 사산 왕조 역사에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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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드 1세
기본 정보
이름카바드 1세
팔라비어: 𐭪𐭥𐭠𐭲 (로마자 표기: Kawād)
칭호이란 및 비이란의 왕 중의 왕
양을 사냥하는 사산 왕조의 왕 (아마도 카바드 1세)
왕조사산 왕조
아버지페로즈 1세
출생473년
사망531년 9월 13일
종교조로아스터교
통치
통치 시작488년
통치 종료531년
제1차 통치
재위 기간488년–496년
이전 통치자발라시
다음 통치자자마스프
제2차 통치
재위 기간498/9년–531년
이전 통치자자마스프
다음 통치자호스로 1세
배우자
배우자삼비케
에프탈 공주
이스파부단 귀족 여성
자녀
자녀카우스
자마스프
크세르크세스
호스로 1세

2. 이름

사산 왕조가 카야니 왕조 역사에 관심을 보이면서, 카바드는 신화 속 카야니 왕 카비 카바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로 Kabatesgre, 중국어로 Chü-he-tochi, 아랍어로 Qubādhara로 음역된다.

3. 즉위 전 상황과 사산 왕조

사산 왕조이었던 페로즈 1세(재위 459-484)의 아들인 카바드는 473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사산 왕조224년 아르다시르 1세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건국한 이래 페르시아 지역을 지배해왔다.

카바드가 태어날 무렵 사산 왕조는 북동쪽 국경 너머의 에프탈 등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카바드의 할아버지인 야즈데게르드 2세(재위 438-457) 시대에는 에프탈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기도 했으나, 아버지 페로즈 1세 시대에 이르러 상황은 악화되었다. 페로즈 1세는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거듭 패배했으며, 482년에는 몸값을 마련하지 못해 어린 카바드를 에프탈 궁정에 인질로 보내기도 했다.

484년, 페로즈 1세는 다시 에프탈 원정에 나섰다가 발흐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전사했다. 이 패배로 사산 왕조 군대는 궤멸되었고, 대 호라산 지역의 주요 도시들이 에프탈의 수중에 넘어가는 등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페로즈 1세의 전사 이후, 그의 형제인 발라시가 카렌 가문의 수크라를 비롯한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귀족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4년 만인 488년에 폐위되었다. 발라시 폐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수크라는 페로즈 1세의 아들인 카바드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당시 카바드의 나이는 15세에 불과했다.

3. 1.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

당시 페르시아는 에프탈이나 훈족의 침입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페로즈 1세에프탈에게 패배한 후 카바드 1세를 인질로 보내고 2년간 무거운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484년 페로즈 1세가 전사하고 군대가 궤멸하자, 수도 크테시폰에 있던 그의 동생 발라시는 실추된 왕가의 권위를 회복하기 어려웠다. 유력자들과 고위 사제들은 카바드 1세를 왕위에 앉혔으나, 그들의 기대는 곧 좌절되었다.

카바드 1세는 15세에 즉위했다. 짧은 뺨 수염을 한 카바드 1세의 주화는 그의 젊음을 보여준다. 카바드 1세는 현저하게 쇠퇴한 상태의 제국을 계승했다. 귀족과 성직자 계층은 국가에 대해 막강한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 왕 발라시를 퇴위시킨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정계를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제국은 가뭄과 기근에 시달렸으며,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겪은 파멸적인 패배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에프탈은 제국 동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으며, 사산 왕조에 막대한 공물을 요구했다. 또한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를 포함한 서부 지역에서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동시에 지방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고, 이들은 지배층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3. 2. 사산 왕조의 군사 제도

사산 왕조이란 사회는 매우 군사화되었고, 지배층은 스스로를 "전사 귀족" (''arteshtaran'')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로마 제국과 비교하면 인구가 훨씬 적고, 더 빈곤하며, 중앙 집권화 정도가 낮았다. 그 결과, 사산 왕조의 샤는 소수의 상비군보다는 귀족에게서 징집한 군사력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왕실 경호 기병대, 수비대 병력, 그리고 이란 외부에서 징집된 부대 정도가 예외였다.

사산 왕조 군대의 중추는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파르티아 귀족 가문들, 즉 ''wuzurgan''이었다. 이들은 사산 왕조의 봉건적 군사 체계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거의 자율적인 존재였다. 사산 왕조의 샤는 이들 ''wuzurgan''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웠고, 그들의 자율성을 제한하려는 시도는 종종 샤의 암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파르티아계 귀족들은 개인적인 이익과 충성 맹세, 그리고 페르시아 지배자와 공유하는 "아리아인" (이란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사산 왕조의 샤를 섬겼다.

군사력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파르티아 귀족 계급 외에서 징집된 아르메니아인 기병대였다. 그러나 451년 아르메니아의 반란과 그에 따른 아르메니아 기병대의 손실은 사산 왕조의 군사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북동부 국경에서 에프탈을 비롯한 훈족의 침입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카바드 1세의 할아버지인 야즈데게르드 2세(재위 438–457)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키다르족과의 전쟁에 쏟아부어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사산 왕조의 권위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군사적 약화는 페로즈 1세(재위 459–484) 시대에 더욱 심화되었다. 페로즈 1세는 484년 발흐 근처에서 벌어진 에프탈과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전사했으며, 군대는 전멸했다. 이 패배로 대 호라산의 주요 도시인 니샤푸르, 헤라트, 마르브 등이 에프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페로즈 1세 사후 혼란 속에서 이란의 7대 가문 중 하나인 카렌 가문의 수크라가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에프탈의 추가적인 침략을 막아냈다. 수크라는 미란 가문의 샤푸르 미란과 함께 페로즈 1세의 형제인 발라시를 왕위에 올렸으나, 발라시가 4년 만에 폐위되자 어린 카바드 1세를 새로운 샤로 추대했다. 카바드 1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수크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실권을 장악했으며, 이는 당시 사산 왕조에서 강력한 군사 지도자가 샤의 권력을 능가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카바드 1세는 성인이 된 후 미란 가문의 유력 귀족이자 수크라와 대립했던 레이의 샤푸르(Shapur of Ray)의 도움을 받아 수크라를 제거했지만, 이 과정은 귀족 세력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왕권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4. 생애

488년 에프탈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카바드 1세는 초기 통치 기간 동안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마즈다크교 운동을 후원했다.[1][2] 그러나 이 급진적인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사 496년 폐위로 이어졌고, 그는 '망각의 성'에 투옥되었다. 동생 쟈마습이 잠시 왕위를 계승했다.[1][2]

카바드 1세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다시 에프탈의 지원을 얻었고, 에프탈 공주와 혼인하여 군사적 기반을 마련했다.[1][10] 498년(또는 499년) 그는 에프탈 군대와 함께 페르시아로 돌아와 복위에 성공하고 반대 세력을 제거하며 왕권을 공고히 했다.[1][2]

두 번째 통치기에 카바드 1세는 동로마 제국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가 보조금 지급을 거절하자 502년 아나스타시우스 전쟁을 일으켜 테오도시오폴리스와 아미다를 점령하는 등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3] 이후 훈족의 침입으로 505년 휴전했으나,[3] 유스티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도 이베리아 전쟁 (526년-532년) 등 갈등이 지속되었으며, 칼리니쿰 전투(531년)에서 승리하기도 했다.[3][5]

내부적으로는 후기에 마즈다크교를 탄압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국가 재정 및 군사력 강화를 위한 세금 및 군제 개혁을 추진하고, 도시 건설과 요새화 사업을 활발히 벌였다.

531년 9월 카바드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호스로 1세가 후계자로 왕위를 이었다.[6] 동시대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카바드 1세를 명석하고 정력적인 군주로 평가하며, 동로마 제국에 성공적으로 맞서고 개혁과 건설 사업을 통해 페르시아의 질서를 회복시킨 인물로 기록했다.

4. 1. 첫 번째 통치 (488년 ~ 496년)

488년 에프탈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카바드 1세는 강력한 귀족 세력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는 귀족과 성직자의 힘을 억제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마즈다크교 운동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마즈다크교는 조로아스터교 사제 마즈다크가 이끈 종교 및 사회 운동으로, 부자와 귀족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공산주의적 성격의 급진적인 개혁을 내세웠다. 카바드 1세는 이 운동을 통해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그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은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496년, 카바드 1세는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어 수사 인근의 '망각의 성'이라 불리는 감옥에 갇혔고, 그의 동생 자마스프가 왕위에 올랐다. 이 시기 사산 제국은 국내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4. 1. 1. 즉위와 수흐라의 섭정

카바드 1세 치세 동안 아흐바즈(호르미즈드-아르다시르)에서 주조된 드라크마


카바드 1세는 488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사산 제국의 왕위에 올랐다. 그의 젊음은 짧은 뺨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묘사된 당시 주화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물려받은 제국은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선왕 발라쉬가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귀족과 성직자 계급은 국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실상 왕을 세우고 폐위하는 '킹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제국은 가뭄과 기근, 그리고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겪은 파멸적인 패배로 인해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에프탈은 제국의 동부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사산 왕조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하여 왕실 재정을 고갈시켰다. 또한 사산 아르메니아와 사산 이베리아를 포함한 서부 속주에서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지방의 농민 계층은 생활 기반이 불안정해지면서 지배층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다.

이처럼 어린 왕이 즉위한 상황에서, 카렌 가문의 수흐라(Sukhra)를 비롯한 귀족 세력의 영향력은 매우 강했다. 발라쉬를 폐위시키고 카바드를 왕위에 앉히는 과정에서 귀족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으며, 특히 수흐라는 당시 가장 강력한 귀족 중 하나로서 사실상의 섭정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카바드는 이러한 강력한 귀족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불안정한 왕위를 시작해야 했다.

4. 1. 2. 수흐라와의 갈등과 제거

488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카바드 1세는 즉위 초기 5년 동안 강력한 귀족이자 카렌 가문 출신인 수흐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당시 수흐라는 발라쉬를 폐위시키고 카바드 1세를 왕위에 앉힌 핵심 인물로,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 알 타바리의 기록에 따르면, 수흐라는 국정 운영과 재정, 군대를 모두 장악했으며 사람들은 카바드 1세가 아닌 수흐라에게 직접 보고하고 조공을 바쳤다. 이 시기 카바드 1세는 이름뿐인 왕, 즉 허수아비에 가까웠다.

493년 성인이 된 카바드 1세는 수흐라의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그를 고향인 이란 남서부의 시라즈로 추방했다. 그러나 수흐라는 추방된 이후에도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며 자신이 카바드 1세를 왕위에 올렸음을 공공연히 내세웠다.

수흐라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한 카바드 1세는 그를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군대는 여전히 수흐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사산 왕조 군대의 핵심인 이란의 7대 가문의 군대를 직접 동원할 힘이 부족했다. 카바드 1세는 수흐라에게 적대적이었던 미흐란 가문의 유력 귀족 레이의 샤푸르에게서 해결책을 찾았다. 샤푸르는 자신의 군대와 수흐라에게 불만을 품은 다른 귀족들을 이끌고 시라즈로 진격하여 수흐라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수흐라는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고, 감옥에서도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져 결국 처형되었다.

수흐라의 제거는 일부 귀족들의 불만을 샀으며, 이는 카바드 1세의 왕권을 일시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 사건으로 수흐라가 속했던 카렌 가문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가문의 구성원들은 수도 크테시폰의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타바리스탄과 자불리스탄 지역으로 추방당하는 등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4. 1. 3. 마즈다크교 논쟁과 폐위

젊고 경험이 부족했던 카바드 1세는 즉위 초 5년간 수흐라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수흐라는 사실상 제국의 통치자였고, 카바드 1세는 이름뿐인 왕에 가까웠다. 493년 성인이 된 카바드 1세는 수흐라를 시라즈로 추방했지만, 여전히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결국 카바드 1세는 미흐란 가문의 레이의 샤푸르와 손잡고 수흐라를 제거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부 귀족들의 불만을 샀고, 카바드 1세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수흐라 제거 후, 카바드 1세는 귀족과 성직자의 힘을 억제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마즈다크교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마즈다크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모바드 (사제)였던 마즈다크가 이끈 종교 및 철학 운동으로, 신학적 가르침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주장했다. 이 운동은 비폭력을 추구하며 재산, 여성, 토지의 공유를 주장했는데, 이는 일종의 공산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특히 '여성 공유' 주장은 하층 계급을 돕기 위해 결혼법을 완화하려던 마즈다크의 의도가 과장되고 비방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카바드 1세는 마즈다크교를 이용하여 왕실 곡물 창고를 개방하고 토지를 하층민에게 분배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마즈다크라는 인물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동시대 역사가인 프로코피우스나 요슈아 더 스타일라이트는 마즈다크를 언급하지 않고, 카바드 1세를 개혁의 주도자로 지목한다. 마즈다크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조로아스터교 문헌이나 알 타바리와 같은 이슬람 시대 자료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이는 카바드 1세의 급진적인 정책에 대한 비난을 마즈다크라는 인물에게 돌리려는 후대의 시각이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카바드 1세의 마즈다크교 후원과 개혁 정책, 그리고 수흐라 처형은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496년, 귀족들은 카바드 1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자마스프를 왕위에 앉혔다. 폐위된 카바드 1세는 처형될 위기에 놓였으나, 후제스탄에 위치한 '망각의 성'이라 불리는 감옥에 투옥되었다.

Obverse and reverse sides of a coin featuring Jamasp
자마스프(재위: 496년 - 498년/499년)의 주화


카바드 1세의 탈출 과정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프로코피우스는 카바드 1세의 아내가 간수와 거래하여 남편을 만날 기회를 얻었고, 이후 카바드 1세가 아내와 옷을 바꿔 입고 여성으로 변장하여 탈출했으며, 친구인 시야우시가 외부에서 도왔다고 기록했다.[10] 반면 타바리는 카바드 1세의 누이가 생리혈이 묻은 카펫에 그를 숨겨 탈출시켰다고 전한다.

탈출에 성공한 카바드 1세는 에프탈 왕에게 망명하여 보호를 받았다.[10] 그는 에프탈 왕의 딸(자신의 조카)과 결혼하고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498년(또는 499년), 카바드 1세는 에프탈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로 돌아왔다. 호라산의 카나라흐 일족인 아데르고둔바데스와 수흐라의 아들인 자르미르 카렌 등 일부 귀족들이 그에게 합류했다. 자마스프와 그를 지지했던 귀족 및 성직자들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지 않았고, 카바드 1세는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복위 후 카바드 1세는 자신을 폐위시키는 데 앞장섰던 구슈나스프다드 등 일부 귀족들을 처형했지만, 동생 자마스프는 눈을 멀게 하는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했다. 그는 대체로 관용적인 정책을 펼치며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고, 시야우시를 군 총사령관, 아데르고둔바데스를 카나라흐 장관, 수흐라의 다른 아들인 보조르그메흐르를 대재상으로 임명하는 등 측근들을 요직에 앉혔다.[10]

복위 후 시간이 흘러 520년대에 이르러 개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카바드 1세는 더 이상 마즈다크를 이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공식적으로 마즈다크교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뿐만 아니라 기독교유대교 지도자들도 마즈다크와 그의 추종자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페르도우시의 『샤나메』에 따르면, 카바드 1세는 후계자인 호스로 1세에게 마즈다크 처리를 맡겼고, 호스로 1세는 마즈다크의 추종자들을 산 채로 땅에 거꾸로 묻어 죽인 뒤, 그 광경을 마즈다크에게 보여주고 그 역시 처형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당시 마즈다크교 탄압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529년에 열린 신학 논쟁에서 마즈다크교는 결국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이후 마즈다크교도들은 박해를 받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마즈다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전해진다.

4. 2. 두 번째 통치 (498년/499년 ~ 531년)

에프탈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은 카바드 1세는 498년(또는 499년) 페르시아로 돌아와 두 번째 통치를 시작했다.[1][2] (자세한 복위 과정은 #투옥, 탈출, 그리고 복위 참조) 복위 직후에는 에프탈에 공물을 보내는 등 의존적인 모습을 보였으나,[3]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그의 두 번째 통치 기간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주요 외교 현안이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에게 북방 민족 방어 보조금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3] 502년 아나스타시우스 전쟁을 일으켜 테오도시오폴리스(현재 에르주룸)와 아미다(현재 디야르바키르) 등지를 점령하며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3] 그러나 505년 캅카스 지역의 훈족 침입으로 휴전하게 되었다.[3] 이후 유스티누스 1세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시기에도 동로마와의 갈등은 계속되어 이베리아 전쟁 (526년-532년)이 발발했으며, 칼리니쿰 전투(531년)에서의 승리 등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졌다.[3][5] (자세한 대외 관계는 #대외 관계 참조)

내부적으로는 초기 마즈다크교를 이용하여 귀족 세력을 견제했으나, 통치 후반기에는 이를 탄압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또한, 국가 재정 및 군사력 강화를 목표로 세금, 군사, 행정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추진했으며(자세한 내용은 #개혁 정치 참조), 여러 도시와 요새를 건설하는 등 활발한 건설 사업을 벌였다(자세한 내용은 #건설 사업 참조).

531년 9월, 카바드 1세는 사망했고 그의 아들 호스로 1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6] 동시대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카바드 1세를 매우 명석하고 정력적인 왕으로 평가하며, 비록 에프탈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에 성공적으로 맞서 싸웠고, 도시 건설과 조세 개혁 등을 통해 페르시아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고 기록했다.

4. 2. 1. 투옥, 탈출, 그리고 복위

마즈다크교의 급진적인 사상을 지지했던 카바드 1세는 귀족 세력의 반발을 샀다. 마즈다크 운동은 부와 여성을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1][2] 이는 기득권을 가진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카바드 1세는 이 운동을 이용하여 강성한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1][2] 결국 496년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었다.[1][2] 귀족들은 카바드 1세 대신 그의 동생인 쟈마습을 왕위에 앉혔다.[1][2]

폐위된 카바드 1세는 후제스탄의 '망각의 성'이라 불리는 감옥에 갇혔다.[1][2] 그의 탈출 과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진다. 프로코피우스는 카바드 1세의 아내가 간수와 잠자리를 하는 대가로 남편을 만날 기회를 얻었고, 카바드 1세는 아내와 옷을 바꿔 입고 감옥을 빠져나왔다고 기록했다. 그의 친구 시야우쉬는 미리 감옥 근처에 말을 준비해두어 탈출을 도왔다.[1] 반면, 알 타바리는 카바드 1세의 누이가 그를 카펫에 말아 탈출시켰다고 전한다. 누이는 카펫이 자신의 생리혈로 더러워졌다고 속여 간수들이 검사하지 못하게 했다.[1] 이 누이는 카바드 1세의 맏아들 카우의 어머니이자 그의 아내이기도 했던 삼비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

감옥에서 탈출한 카바드 1세는 에프탈 왕에게 망명하여 그의 지원을 얻었다.[1][2] 그는 에프탈 왕의 딸과 혼인하여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1] 에프탈에 머무는 동안, 그는 니샤푸르 출신의 농부 소녀 니완두흐트를 만나 아들 코스로 1세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1] 이는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 코스로 1세의 어머니는 이스파부단 가문 출신의 귀족 여성이었다.[2]

498년(또는 499년), 카바드 1세는 에프탈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로 돌아왔다.[1][2] 그는 호라산을 지날 때 카라안기안 가문의 아데르구두운바데스와 수흐라의 아들인 자르미르 카렌의 지지를 확보했다.[1][2] 쟈마습과 그를 지지했던 귀족 및 성직자들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지 않았다.[1] 그들은 카바드 1세가 쟈마습과 귀족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의 복위를 받아들였다.[1]

복위한 카바드 1세는 자신에게 반대했던 구슈나스프다드와 다른 귀족들을 처형했지만, 전반적으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지위를 안정시켰다.[1][2] 쟈마습은 목숨은 건졌으나 실명된 것으로 추정된다.[1] 카바드 1세는 자신을 도왔던 인물들을 요직에 앉혔다. 아데르구두운바데스는 새로운 카라랑(군사 지도자)이 되었고,[1] 시야우쉬는 군대의 총사령관(''arteshtaran-salar'')이 되었으며,[1] 수흐라의 또 다른 아들인 보조르그메르는 재상(''wuzurg framadar'')으로 임명되었다.[1] 소규모의 외국 군대에 의지하여 귀족-성직자 연합을 누르고 왕위를 되찾은 이 사건은 당시 사산 제국이 처한 불안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1]

4. 2. 2. 개혁 정치

섬네일의 삽화]]

젊고 경험이 부족했던 카바드 1세는 샤가 된 처음 5년 동안 강력한 귀족 수흐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이 시기 카바드 1세는 사실상 허수아비였고, 수흐라가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알 타바리에 따르면 수흐라는 국정 운영을 총괄했으며, 사람들은 카바드 1세를 무시하고 수흐라와 모든 일을 처리했다. 수흐라는 왕실 재정과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493년 성인이 된 카바드 1세는 수흐라의 지배를 끝내기 위해 그를 고향인 시라즈로 추방했다. 그러나 수흐라는 추방된 후에도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며 자신이 카바드 1세를 왕위에 앉혔음을 과시했다.

수흐라의 잠재적 위협을 느낀 카바드 1세는 그를 제거하고자 했으나, 군대가 수흐라에게 통제되어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미흐란 가문의 귀족이자 수흐라의 정적인 레이의 샤푸르의 도움을 받았다. 샤푸르는 수흐라를 격파하고 수도 크테시폰에 투옥시킨 뒤 처형했다. 이 사건은 일부 귀족들의 반발을 사 카바드 1세의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수흐라 처형 직후, 조로아스터교 사제 마즈다크가 이끄는 마즈다크교 운동이 카바드 1세의 주목을 받았다. 마즈다크교는 종교적 가르침 외에도 귀족과 성직자의 특권에 도전하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주장했다. 이 운동은 비폭력과 함께 부, 여성, 재산의 공유를 요구했는데, 이는 일종의 공산주의적 성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단, 여성 공유 주장은 하층민 구제를 위한 혼인 관습 개혁을 왜곡한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카바드 1세는 마즈다크 운동을 귀족과 성직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왕의 지원 아래 곡물 창고가 개방되고 토지가 하층민에게 분배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마즈다크의 실존 여부와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마즈다크가 카바드 1세의 급진 개혁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일 수 있다고 본다. 동시대 기록에는 마즈다크에 대한 언급이 없고 카바드 1세가 개혁의 주체로 묘사되기도 한다. 후대 문헌에 나타나는 마즈다크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구전 과정에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즈다크 운동으로 인한 사회 혼란과 귀족들의 반발, 그리고 수흐라 처형에 대한 불만 등이 겹쳐 496년 카바드 1세는 폐위되고 동생 쟈마습이 왕위에 올랐다. 카바드 1세는 '망각의 성'에 유폐되었으나 탈출하여 에프탈의 지원을 받아 498년 복위했다.

복위 후 카바드 1세는 더욱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을 이어나갔다. 520년대에는 더 이상 마즈다크교의 지지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지원을 중단하고 탄압으로 돌아섰다. 페르도우시의 샤나메에 따르면, 마즈다크와 그의 추종자들은 카바드 1세의 아들 호스로 1세에 의해 잔혹하게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성은 불확실하다.)

카바드 1세의 치세 후반기와 그의 아들 호스로 1세 시대에는 마즈다크 운동으로 약화된 귀족과 성직자들의 협조 아래 본격적인 국가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는 5세기 후반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겪은 패배가 주요 원인이었다. 주요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금 개혁: 공정한 과세를 위해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인두세를 도입했다.
  • 군사 개혁: 제국을 4개의 변경 지역(중세 페르시아어: ''kust'')으로 나누고 각 지역에 군 사령관(스파흐베드)을 임명했다. 병사들의 장비 유지를 위한 지원 시스템을 마련했다. 기존의 파르티아 귀족 중심 군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왕에게 직접 충성하고 봉급을 받는 소규모 지주 출신 기병대(데흐칸)를 육성했다. 에프탈, 아랍인, 다일람인 등 동맹 부족에서도 병력을 모집했다.
  • 행정 개혁: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해 "빈자의 옹호자이자 재판관"(''driyōšān jādag-gōw ud dādwar'')이라는 새로운 성직자 직함을 만들었다.


카바드 1세는 또한 광범위한 건설 사업을 벌였다. 미디아, 이스파한, 파르스 등지에 여러 도시를 건설하거나 재건했으며, 특히 케르만샤를 재건하여 자신의 거처 중 하나로 삼았다. 메이보드에는 조로아스터교 불의 신전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캅카스 지역에서는 데르벤트에 새로운 요새와 성벽(압주드-카와드)을 건설했으며, 캅카스 알바니아 왕국의 주요 도시인 바르다(페로즈카와드로 개칭)와 카발라의 요새를 강화했다. 베일라간과 같은 도시도 건설했다. 이러한 요새화 작업은 캅카스 지역을 페르시아의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사산 왕조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새롭게 정비된 군대는 이후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성과를 거두고 예멘을 정복하거나 페르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서 돌궐 카간국을 격파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귀족 세력(특히 와주르간)과 왕권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를 약화시켜 후대 왕들의 시대에 귀족 반란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프로코피우스는 카바드 1세를 매우 명석하고 정력적인 왕으로 평가했다. 비록 에프탈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동로마 제국에 맞서 성공적으로 싸웠으며, 도시 건설과 조세 개혁을 통해 페르시아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4. 2. 3. 대외 관계

에프탈의 도움으로 복위한 카바드 1세는 에프탈에게 공물을 보냈다.[3] 또한, 과거 동로마 제국이 페르시아에 지급했던 북방 이민족 방어 보조금을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에게 다시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3]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페르시아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보조금 지급 거부가 전쟁으로 이어질 것을 예상했을 수 있다.[3]

결국 카바드 1세는 502년 에프탈과 연합하여 동로마 제국령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며 아나스타시우스 전쟁을 시작했다.[3] 이는 440년 이후 약 60년 만에 벌어진 양 제국 간의 첫 주요 전쟁이었다.[3] 카바드 1세는 방비가 허술했던 테오도시오폴리스(현재의 에르주룸)를 현지 주민의 도움을 받아 점령했다.[3] 이후 502년 가을부터 503년 겨울까지 아미다(현재의 디야르바키르)를 포위 공격했다. 아미다는 군대의 지원 없이도 3개월간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함락되었다.[3] 카바드 1세는 아미다 주민들을 페르시아 남부 웨흐-아즈-아미드-카와드로 이주시켰다.[3] 아미다 정복은 샤푸르 2세 시대 이후 사산 왕조 군대가 거둔 가장 큰 군사적 성과였다.[3] 그러나 동로마군의 반격으로 아미다 탈환 시도가 있었고, 카바드 1세 역시 에데사 공략에 실패했다.[3] 505년, 캅카스 지역으로 훈족이 침입하자 양측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동로마 제국은 아미다를 돌려받는 대가로 캅카스 요새 유지 비용을 페르시아에 지불하기로 합의했다.[3] 평화 조약은 카바드 1세의 매형인 이파브두한 귀족 바위에 의해 체결되었다.[3]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카바드 1세는 503년 동로마와의 전쟁 중 "적대적인 훈족"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동쪽 국경으로 이동해야 했다.[3] 페로즈 1세 시대의 패배 이후 호라산 지역은 에프탈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카바드 1세의 2차 치세 동안 상황이 반전되어 512년 또는 513년경에는 마르에서 사산 왕조 동전이 주조되는 등 호라산 지역을 재정복했음을 시사한다.[3]

카바드 1세 치하에서 사산 제국은 페르시아만의 전략적 위치를 이용하여 지역 무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3] 동로마 상인들이 인도 무역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쪽의 굽타 제국부터 남쪽의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왕국에 이르기까지 인도 아대륙의 무역 파트너들과 협상하거나 동로마 선박을 공격하기도 했다.[3] 이를 통해 페르시아 상인들은 인도 무역에서 사실상의 독점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3]

카바드 1세와 기독교 신하들과의 관계는 복합적이었다. 이베리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강요하며 정통 조로아스터교의 옹호자로 나섰지만, 아르메니아에서는 선대 왕 발라슈의 평화 정책을 이어가며 기독교도와의 분쟁 해결에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본토의 기독교도들은 512년 또는 513년경 잠시 처벌 기록이 있었음에도 대체로 박해 없이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카바드 1세는 자마스프처럼 동방교회 총대주교 바바이를 지지했으며, 기독교도들이 궁정에서 고위직을 맡기도 했다.[3] 사산 왕조 군주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필요가 있을 때만 다른 종교를 박해했다는 시각도 있다.[3] 카바드 1세는 496년 이전에 제국의 모든 종교 공동체에 신념에 대한 설명을 제출하도록 명령했고, 이에 따라 아카키우스 총대주교는 니시비스 학파의 엘리샤 바르 쿠즈바예에게 의뢰하여 동방 교회의 입장을 시리아어로 작성, 이를 중세 페르시아어로 번역하여 제출했다.[3] 카바드 1세 시대는 사산 제국과 기독교 관계의 전환점으로, 이전까지 예수는 주로 동로마 제국의 수호자로 여겨졌으나, 카바드 1세가 아미다 공성전 중 예수의 환영을 보고 격려를 받았다는 기록(비록 출처는 불분명하지만)이 나타나는 등 변화가 감지된다.[3]

520년경, 카바드 1세는 막내아들 호스로 1세의 후계 계승을 확실히 하고 마즈다크교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당시 동로마 황제 유스티누스 1세에게 호스로 1세를 양자로 삼아달라고 제안했다.[3] 이 제안은 처음에는 환영받았으나,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법무 자문 프로클루스가 호스로 1세가 장차 동로마 제위를 노릴 수 있다며 반대했다.[3] 동로마 측은 로마 시민이 아닌 '야만인'으로서 입양하는 절충안을 제시했지만[4],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이 일로 호스로 1세는 모욕감을 느끼고 동로마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다고 전해진다.[3] 협상 결렬의 책임을 물어 당시 협상 대표였던 시야우시가 처형되었는데, 그는 마즈다크교 신자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카바드 1세는 귀족들이 꺼리던 그의 막강한 권력을 제한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

Dara의 폐허가 된 요새 사진
다라 요새의 폐허


협상 결렬 후에도 한동안 전면전은 없었으나, 528년 새로운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하면서 이베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호스로 1세를 카바드 1세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3] 분쟁은 라지카에서 시작되어 메소포타미아로 확산되었다. 530년, 다라에서 벌어진 다라 전투에서 페로제스가 이끄는 사산 제국 군대는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하는 동로마군에게 큰 패배를 당했다.[3] 그러나 이듬해인 531년, 카바드 1세는 아자레테스에게 군대를 주어 동로마령 코마게네를 침공하게 했다.[3] 벨리사리우스 군대가 접근하자 아자레테스는 후퇴하여 칼리니쿰에서 맞섰다.[3] 이어진 칼리니쿰 전투에서는 동로마군이 패배했지만, 페르시아 측 손실도 막대하여 카바드 1세는 아자레테스를 질책하고 지휘권을 박탈했다.[3][5] 같은 해, 페르시아군은 마르티로폴리스를 포위했으나, 공성 중이던 531년 9월 13일 카바드 1세가 사망했다.[6] 그의 뒤를 이은 호스로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3]

4. 2. 4. 건설 사업

카바드 1세 치세 동안 많은 도시가 창건되거나 재건되었다. 그는 미디아에 에란-아산-케르드-카와드(Eran-asan-kerd-Kawad) 도시를 건설했으며, 이스파한에는 파라즈(Fahraj)를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파르스에는 웨흐-카와드(Weh-Kawad), 에란-위날드-카와드(Eran-win(n)ard-Kawad), 카와드-후와라(Kawad-khwarrah), 그리고 아라잔을 건설했다. 그는 또한 미디아의 케르만샤를 재건했으며, 이곳을 자신의 거주지 중 하나로 사용했다. 또한, 메이보드에는 조로아스터교 불의 사원이 세워진 것을 기념하여 하프트-아다르(Haft-adhar, "일곱 개의 불")라는 읍을 건설했다고 한다. 이 사원의 불은 파르스, 발흐, 아다르바다간, 니사, 이스파한, 가즈니, 그리고 크테시폰에 있는 일곱 개의 다른 사원에서 가져온 불을 합쳐 만든 것이었다.

코카서스 지역에서도 활발한 건설 활동이 이루어졌다. 카바드 1세는 데르벤트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으며, 압주트 카와트 성벽(중기 페르시아어: ''*Abzūd Kawād'', "카바드의 영광이 증가했다" 또는 "번성했다"는 의미)의 건설을 명령했다. 페로즈 1세 치세에 재건되어 페로자바드("페로즈의 도시")로 명명되었던 코카서스 알바니아의 주요 수도 파르타우는 카바드 1세에 의해 요새화되었고 페로즈카바드("승리의 카바드")라고 불렸다. 알바니아의 옛 수도였던 카발라 역시, 동방 교회의 주교좌를 포함한 대규모 도시 지역과 함께 카바드 1세에 의해 요새화되었다. 그는 또한 바일라칸 도시를 건설했는데,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도시를 오늘날 오렌-칼라(Oren-qala) 유적과 동일시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광범위한 건축과 요새화는 코카서스 알바니아를 코카서스에서 이란의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거점으로 변화시켰다.

5. 후계

카바드 1세는 여러 아들 중 막내인 코스로 1세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다. 당시 코스로 1세는 경쟁 상대인 형제들과 마즈다크교 파벌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했다. 카바드 1세가 왜 특별히 막내아들 코스로 1세를 선호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코스로 1세의 왕위 계승을 확실히 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카바드 1세는 520년경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누스 1세에게 코스로 1세를 양자로 삼아달라고 제안했다.[12] 이 제안은 처음에는 유스티누스 1세와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황제의 법무 장관 프로클루스는 코스로 1세가 나중에 동로마 황제 자리를 노릴 것을 걱정하며 반대했다. 결국 동로마 측은 코스로 1세를 정식 로마인이 아닌 이방인 신분으로 입양하는 방식을 제안했고,[13]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 일로 코스로 1세는 동로마 제국에 모욕감을 느꼈고, 이는 훗날 그가 동로마 제국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 입양 협상에 사산 제국 측 외교관으로 참여했던 마흐보드는 함께 갔던 시아우쉬가 일부러 협상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13] 시아우쉬는 페르시아 법에 어긋나게 새로운 신을 섬기고 죽은 아내를 땅에 묻었다는 등의 추가적인 비난도 받았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시아우쉬는 카바드 1세가 한때 지지했으나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게 된 마즈다크교 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시아우쉬는 카바드 1세의 오랜 친구였고 과거 카바드 1세가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왔지만, 카바드 1세는 그의 처형을 막지 않았다. 이는 겉으로는 다른 귀족들의 미움을 받던 군 사령관 시아우쉬의 강력한 힘을 누르려는 카바드 1세의 의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아우쉬는 처형되었고 그의 직책도 폐지되었다. 입양 협상은 실패했지만, 530년까지 사산 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의 서쪽 국경에서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양측은 남쪽의 아랍 동맹국과 북쪽의 훈족을 이용하여 대리전을 벌였다.

프로코피오스를 비롯한 여러 역사가들에 따르면, 카바드 1세는 죽기 직전에 코스로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문서를 남겼다. 역사가 요하네스 말랄라스는 카바드 1세가 직접 코스로 1세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531년 코스로 1세가 왕위에 오르자, 바위를 비롯한 일부 페르시아 귀족들은 그를 몰아내고 카바드 1세의 둘째 아들인 자마스프의 아들 카바드를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7][16] 이 음모를 알아챈 코스로 1세는 자신의 모든 형제들과 그 자녀들, 그리고 바위를 포함해 음모에 가담한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코스로 1세는 또한 어린 조카 카바드의 처형도 명령했다. 하지만 카바드를 돌보던 아데르고운바데스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비밀리에 카바드를 키웠다. 결국 541년 아데르고운바데스의 아들 바흐람이 이 사실을 코스로 1세에게 밀고했다. 코스로 1세는 카바드를 처형했지만, 카바드 본인 또는 그를 사칭한 인물이 동로마 제국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8][17]

6. 유산

카바드 1세의 치세는 사산 왕조 역사에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9][18] 그는 많은 도전과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사산 제국을 통치한 가장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9][18] 이란학자 니콜라우스 신델(Nikolaus Schindel)은 그를 "다소 마키아벨리적 유형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천재였다"고 평가했다.[9][18]

카바드 1세는 쇠퇴한 제국을 다시 활성화하려는 노력에 성공했고, 그의 아들 호스로 1세에게 원활하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이끌었다. 호스로 1세는 아버지로부터 강력한 제국을 물려받아 통치 기간 동안 더 많은 개선을 추진하여 이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왕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아누시르반"(불멸의 영혼)이라는 칭호를 얻었다.[9][18]

또한, 931년부터 1090년까지 타바리스탄과 고르간을 주로 통치했던 지야르 왕조는 왕조의 창시자인 마르다비지(재위 930년-935년)가 카바드 1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7. 가계도

'''범례'''
style="background-color:#F7BE81; width:20px;" |사산 왕조의 왕



'''사산 왕조 가계도 (카바드 1세 중심)'''
세대인물비고
1세대야즈데게르드 2세(재위: 438-457)
2세대 (야즈데게르드 2세의 자녀)호르미즈드 3세(재위: 457-459)
페로즈 1세(재위: 459-484)
발라시(재위: 484-488)
자릴(485년 사망)
3세대 (페로즈 1세의 자녀)바렌두흐트
카바드 1세(재위: 488-496, 498/9-531)
자마스프(재위: 496-498/9)
페로즈두흐트
삼비케
4세대 (카바드 1세의 자녀)카우수(533년 사망)
자마스프
크세르크세스
호스로 1세(재위: 531-579)


참조

[1] 웹사이트 VI http://www.gutenberg[...]
[2] 서적
[3] 서적
[4] 웹사이트 XI http://www.gutenberg[...]
[5] 웹사이트 Book I.xviii http://www.gutenberg[...]
[6] 웹사이트 Book I.xxi https://www.gutenber[...]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웹사이트 VI http://www.gutenberg[...]
[11] 서적
[12] 서적
[13] 웹사이트 XI http://www.gutenberg[...]
[14] 웹사이트 XVIII http://www.gutenberg[...]
[15] 웹사이트 XXI https://www.gutenber[...]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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